사공의 노래 - Ten. 박인수
사공의 노래
함호영 시
홍난파 곡
테너 박인수
물 맑은 봄바다에 배 떠나간다
이 배는 달맞으러 강릉 가는 배
어기야 디여라 노를 저어라
순풍에 돛 달고서 어서 떠나자
서산에 해 지며는 달 떠온단다
두둥실 두리둥실 배 떠나가네
물 맑은 봄 바다에 배 떠나간다
홍난파(洪蘭坡, 본명: 永厚, 일본이름: 모리카와 준 森川潤, 예명: 羅素雲, 1898 - 1941)
작곡가, 바이올리니스트, 음악평론가, 수필가, 소설가, 번역가.
43세의 짧은 생애를 산 당시의 한국 음악인으로서는 대단히 다양한 예술활동을 벌였다.
홍난파는 한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잘 알려진 음악가이다.
이는 한국 역사상 한 음악가에 부여된 명성으로는 가장 큰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음악에 서려있는 "애수"를 사람들은 즐겨 "민족의 애수"로 받아들였다.
1940년대에는 모든 것이 전쟁에 맞추어 생각되었고, 거기에 따라 사람들이 동원되었다.
그는 총독부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국민총력조선연맹의 문화위원에 임명되어
일제를 위한 대동아 전쟁의 선전원이 되고 말았다.
물론 그가 총독부의 일을 즐겨했다는 흔적은 없다.
그가 총독부 일을 부담스러워했다는 친지의 증언은 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지울 수 없는 친일의 글을 남기고 있다. 그를 위해 애석한 일이다.
홍난파의 일생은 식민지 시기 내에 한정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음악은 식민지 시기가 끝나면서 더욱 크게 부각되었다.
그는 『봉선화』, 『금강에 살어리랏다』, 『봄처녀』,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와 같은 "가요"와
『달마중』, 『낮에 나온 반달』, 『퐁당퐁당』, 『고향의 봄』과 같은 동요를 통해
해방 직후의 음악 교과서를 통해 한국인에게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
『봉선화』와 『고향의 봄』과 같은 노래는 이미 그 이전부터 민요보다 더 광범위하게 불리는 것이었다.
해방 이후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의 교과서에서 보는 그의 독과점적인 위치는
그를 거의 한국의 대표 음악가처럼 알려지게 한다.
그는 일반인이 부를 있는 한 옥타브를 약간 벗어나는 음역의 선율만을 사용한다.
즉 그의 노래는 리듬적으로 선율적으로 대단히 쉽게 배울 수 있는 성격의 것이었다.
그는 못갖춘 마디의 음악을 많이 썼는데, 이상하게 들리는 일이 없었다.
이런 경우 아직도 어색하게 한국어와 결합시키는 작곡가들이 많다.
그는 작은 음악(노래)의 대가였던 것이다.
후에 윤이상이 그의 동요들이 "주옥과 같다"고 말한 것은 일리가 있다.
홍난파는 자신의 음악으로 대단한 것을 성취했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자신의 음악적 능력에 대해서도 스스로 회의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잘 해낸 사람이었고,
당대에 필요한 것을 제공한 작곡가였다.
[홍정수]
<글출처: 웹사이트 / 음원출처: http://jnjmuse.cnei.or.kr>